이시다 이라의 책은 실패한 적이 없다.
어떤 책을 읽어도 감동과 재미와 완성도 세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안전한 작가.
특히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같은 추리+성장소설을 읽고 최고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 <잠들지 않는 진주>는 장르를 넘나들며 종횡무진하는 이시다 이라의 가슴시리게 아름다운 멜로물이다.

주인공은 마흔다섯살 성공한 여류판화가인 사요코.
블랙매직펄에셀 색상의 폭스바겐의 폴로를 몰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히로산의 2층짜리 별장에,
아프간하운드 한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테라스 쪽 자리에 앉으면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LIQUID CAFE 에서 로열밀크티더블을 마시며 작업 구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세살 연상의 화랑지배인인 다쿠지라는 연인이 있다. 아내가 있는...

"또야~"
사실 처음에 불륜의 연인이 있다는 설정은 맘에 들지 않았다.
불륜 같은 거, 식상하고 칙칙하고 꿀꿀한 이야기로 가는 지름길.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깊은 나락으로 가라앉고 마는 여주인공이 흔히 등장한다.
젊은 작가들은 불륜의 상대에게 버림받고 구질구질하게 실연의 아픔을 겪는 여주인공을 깜짝 등장한 백마탄 왕자님에게 구출시켜 샤방샤방하고 씩씩하게 변화시키고,
약간 연륜 있는 작가들은 깊은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타락을 거듭하는 애처로운 여주인공을 묘사하기 쉽상이다.
지루하다.

이 책은 다르다. 주인공 사요코는 불륜 상대인 다쿠지와의 관계를 스스로의 의지로 일찌감치 정리한다. 다쿠지는 사요코에 있어 떨치기 힘들었던 과거일 뿐이다. 그리고 강하고 아름다운 손을 가진 17살 연하의 다큐멘터리 작가 모토키를 알게 된다. 그녀는 어쩌면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렇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가 현재 그녀의 나이 마흔다섯살이 되면 그녀는 예순두살이다... 서서히 스며드는 사랑. 그 끝은 어떻게 될까?

안돼, 절대로 달콤한 기분에 빠져서는 안 돼. 저 남자는 나보다 열일곱 살이나 어려. 사요코는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고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 p.94

특히 이렇게 끝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그녀의 용감한(무모한) 사랑이 아름답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성숙한 연대가 감명깊었다.

언젠가 끝날 것을 알고 있는 젊은 남자와의 연애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달았다. 사요코는 자신이 어미 새라고 생각했다. 새끼 새를 품는 마음으로 영화계로 돌아갈 때까지 모토키를 돌봐주면 되는 것이다. 때가 되면 모토키는 하늘을 향해 날개를 퍼덕이며 자유롭게 날아오르겠지. 붙잡을 수 없고 같은 예술가로서 응원해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사요코는 새끼를 떠나보내는 어미 새의 심정으로 그 이별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토키가 돌아가는 세계는 사요코라는 둥지와는 전혀 다른 별천지고 거기에는 젊은 노아가 기다리고 있다. - p.195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보낼 수밖에 없는 마음.
2-3살만 어렸어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을 이야기이다.
몇년 전 김정은, 김상경 주연의 <내 남자의 로맨스> 라는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름답고 잘난 악역이 등장했기 때문에 사랑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내 남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는 여주인공. 그 때 처음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사랑하니까 보내줄 수도 있겠구나. 행복하길 바라니까 그럴 수 있겠구나. 그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서 재미로 본 로맨틱코미디 영화지만 가슴이 아파왔다.

노아의 대답에 둘은 목소리를 함해 웃음을 터뜨렸다. 사요코는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모토키의 일은 잘 알았어. 그 사람이 본래 자리로 돌아 갈 수 있도록 나도 모든 힘을 보탤게. 그는 역시 노아 씨하고 함께 있는 게 제일 좋아. 그건 나도 잘 알지."

시이나 노아는 사요코의 눈을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것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두 여인만이 나눌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질투나 안타까움, 외로움도 있다. 하지만 모래알처럼 많은 남자들 중에 하필이면 같은 사람을 택했고, 또 그 사람에게 선택을 받았다. 마음 한구석이 통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 p.192

이런 장면은 최근에 읽은 한국 소설 <걸프렌즈>가 떠올랐다.
한 남자를 사랑한 세 여자의 유치한 연대.
그 책의 리뷰에서 너무 악평을 써서 미안하지만, 글이 너무 가벼웠다.
이 책에서의 이시다 이라처럼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진심어린 공감대를 형성하는 연대를 묘사했다면 훨씬 깊이가 생겼을텐데.

나를 비롯해서 아직은 어린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하는 책.
진짜 어른들의 성숙한 로맨스 <잠들지 않는 진주>
2007/09/26 10:42 2007/09/2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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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복한아이 2007/10/09 13:08

    웨쥬 님, 익살 님 에 이어...
    알라딘 2007년 9월 4주 TTB리뷰 당선작 으로 선정되었어요~ +_+
    http://blog.aladdin.co.kr/town/winner/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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